어머니께서 통화하던 중 불쑥 물으셨습니다. "오늘 며칠이니?" 저는 그냥 "4월 20일이요"라고 답했고, 잠깐의 침묵 끝에 통화가 끝났습니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없는 대화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어머니 생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리면서, 저는 그 짧은 통화가 내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혹시 어머니는 그 이야기를 꺼내고 싶으셨던 건 아닐까. 질문에만 답하고 마음에는 답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날짜 질문 하나가 담고 있는 것직접 겪어보니 가족의 말은 정말 겉과 속이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어머니께서 날짜를 물으신 것은 분명 단순한 정보 확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질문 이후 며칠이 지나도록 왜 그 전화가 마음에 걸렸는지 생각했습니다. 결국 제가 내린 답은 이겁니다. 가족은..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후회하는 말이 있습니다. 상담 현장에서 가족을 떠나보낸 분들을 만나다 보면, 돈이나 시간이 아닌 단 한마디를 못 했다는 후회가 가장 깊었습니다. "사랑해." "고마워." "덕분이야." 그 짧은 문장이 끝내 전해지지 못한 채 관계가 닫혀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 마음이 없어서 못 한 것이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언어가 다르면 같은 마음도 다르게 읽힌다가족 상담을 하다 보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제 마음 알잖아요." "굳이 말해야 알아요?"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사랑하는 건 알 텐데요." 저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조용히 되물어보고 싶어 집니다. 정말로 상대가 알고 있을까요? 여기서 사랑의 언어란 각자가 사랑을 표현하고 받..
"우리가 싸우는 이유가 정말 생각이 달라서일까요, 아니면 다르다는 사실 자체를 못 참아서일까요?" 몇 년 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상한 장면을 하나 봤습니다. 한국에서 활동하던 외국인 방송인이 자국 여성과 한국 여성의 차이를 설명하는 자리였는데, 그가 계속 "틀리다"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진행자가 "다른 거죠?"라고 정정해도, 그는 또 "틀리다"라고 했습니다. 웃기기도 했지만 저는 그 장면에서 뭔가 불편한 걸 느꼈습니다. 한국어를 배운 외국인이 왜 하필 "다르다"보다 "틀리다"를 더 자주 쓰게 됐을까. 혹시 우리가 평소에 그렇게 말하고 살아온 건 아닐까, 하고요. 다름과 틀림 — 예능 장면 하나가 드러낸 언어 습관저는 그 예능 장면을 본 뒤 한동안 그 생각을 놓지 못했습니다. 언어는 그냥 도구가 아닙니다...
대전 도시철도 개찰구를 지나다 보면 맑은 새소리가 납니다. 처음엔 그냥 좋았습니다. 회색 콘크리트와 차가운 기계음 사이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가 도시 한가운데서 만나는 작은 숲처럼 느껴졌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소리가 달리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자세히 듣다 보니 유료 승차권을 쓸 때와 무료승차권을 쓸 때 알림음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 순간부터 새소리는 더 이상 새소리만이 아니었습니다. 개찰구 알림음, 두 종류라는 사실을 아셨나요?대전 도시철도를 자주 이용하는 분들도 대부분 그냥 지나칩니다. 저도 처음엔 우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계속 관찰하다 보니 패턴이 보였습니다. 유료 승차권을 사용할 때 나는 알림음과, 무료승차권을 사용할 때 나는 알림음이 분명히 달랐습니다. 여기서 알림음..
좋은 의도로 한 행동이 오히려 주변을 힘들게 만든 적, 있으십니까? 저는 있습니다. 그것도 꽤 오랫동안. 사회복지사로 일하던 시절, 저는 톨게이트 검표원들의 일자리를 생각하며 하이패스 단말기를 설치하지 않았습니다. 하이패스 차선이 텅 비어 있고 일반 차선에 긴 줄이 늘어서 있을 때, 저는 그 줄에 서 있으면서 뿌듯함까지 느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게 진짜 문제의 시작이었습니다. 하이패스 거부가 알려준 것저는 당시 사람을 돕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어려운 이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고, 자동화 확대로 일자리를 잃을 수 있는 검표원들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하이패스를 설치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소신 있는 선택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결국 저도 하이패스를 설치하던 날, 이상한..
상담을 오래 할수록 잘하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믿었고, 주변에서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경력이 조금 쌓였다고 느끼던 어느 날, 가장 열심히 준비한 상담에서 내담자는 달라지지 않았고, 식은땀을 흘리며 거의 아무 말도 못 한 상담에서 내담자는 "정말 도움이 됐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제가 무언가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경험이 쌓일수록 선입견이 생긴다상담 경력이 어느 정도 쌓이면 신기한 일이 생깁니다. 내담자가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머릿속에서 분석이 시작됩니다. 옷차림, 걸음걸이, 첫 인사의 목소리 톤, 앉는 자세. 이것들이 쌓여서 어느 순간 하나의 그림이 완성됩니다. 동료 상담사 중에는 농담처럼 이런 말을 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1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