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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담을 오래 할수록 잘하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믿었고, 주변에서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경력이 조금 쌓였다고 느끼던  어느 날, 가장 열심히 준비한 상담에서 내담자는 달라지지 않았고, 식은땀을 흘리며 거의 아무 말도 못 한 상담에서 내담자는 "정말 도움이 됐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제가 무언가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경험이 쌓일수록 선입견이 생긴다


    상담 경력이 어느 정도 쌓이면 신기한 일이 생깁니다. 내담자가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머릿속에서 분석이 시작됩니다. 옷차림, 걸음걸이, 첫 인사의 목소리 톤, 앉는 자세. 이것들이 쌓여서 어느 순간 하나의 그림이 완성됩니다. 동료 상담사 중에는 농담처럼 이런 말을 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10초면 대충 감이 온다."

    여기서 선입견이란,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기 전에 기존 경험과 판단을 먼저 적용해버리는 인지적 경향을 말합니다. 상담 장면에서는 내담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런 유형, 이런 원인, 이런 해결책'이라는 결론이 머릿속에서 먼저 완성되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가족 이야기를 듣고, 말투를 보고, 표정을 보고 나면 어느새 머릿속에서 결론이 완성됐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전달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담자의 말을 자주 끊었고, 설명을 시작했고, 조언을 건넸습니다. 상담실은 제 목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상담이 끝나면 나름 뿌듯했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했고,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상담에서 내담자는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삶은 그대로였고, 관계도 그대로였습니다.

    돌아보면 답은 단순했습니다. 저는 내담자를 이해한 것이 아니라 분류하고 있었던 겁니다. 경험이 자산이 아니라 벽이 되어버린 순간이었습니다. 실제로 인지심리학 연구에서도 전문가일수록 초기 판단을 바꾸지 않으려는 경향, 즉 확증편향이 강해질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출처: 한국심리학회](https://www.koreanpsychology.or.kr))

    경청이 무너지면 상담도 무너진다

    Active listening


    상담에서 경청이란 단순히 입을 다물고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경청이란, 상대의 말 뒤에 있는 감정과 맥락, 그리고 말하지 않은 이야기까지 주의를 기울이는 적극적 행위를 의미합니다. 상담 전문가들은 이를 '능동적 경청(active listening)'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미 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순간, 경청은 사실상 멈춥니다. 귀는 열려 있어도 마음이 이미 다른 곳에 가 있는 상태입니다. 내담자의 말은 제가 세운 결론을 확인하는 용도로만 사용됩니다. 정작 내담자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그 사이에서 지나쳐버립니다.

    잊히지 않는 상담이 있습니다. 어떤 날은 내담자의 이야기를 따라가기도 벅찼습니다. 무슨 질문을 해야 할지 몰랐고,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확신이 없었습니다. 상담 시간 내내 긴장했고, 식은땀까지 났습니다. 상담이 끝난 후 스스로 자책했습니다. 상담자로서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내담자가 말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오늘 정말 도움이 됐어요."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조언도 없었고, 통찰도 없었고, 해결책도 없었습니다. 나중에야 조금 이해하게 됐습니다. 그날 저는 말은 많이 못 했지만, 정말 열심히 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르니까 더 집중해서 들었고, 모르니까 판단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경청이 이루어지는 상담에서 실제로 달라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 내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말할 수 있다
    - 판단받지 않는다는 느낌이 생긴다
    - 말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감정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 상담자의 조언 없이도 내담자 스스로 실마리를 찾는 경우가 생긴다

    상담의 힘은 상담자가 얼마나 많은 말을 했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얼마나 깊이 들었는가에 있습니다.

    실패로 배운 좋은 관계


    제가 경험한 상담 실패의 공통점은 하나였습니다. 제가 이미 결론을 가지고 상담실에 들어갔을 때입니다. 내담자를 만나기 전에 이미 '이런 사람, 이런 문제, 이런 해결책'이 머릿속에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패턴은 상담실 밖에서도 똑같이 반복됩니다. 부모는 자녀를 안다고 생각하고, 상사는 직원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선배는 후배에게 "그건 내가 해봐서 알아"라고 말합니다. 경력이 많을수록, 나이가 많을수록 더 쉽게 결론을 내립니다. 정작 상대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못합니다. 이미 결론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인지적 폐쇄 욕구란, 불확실한 상황에서 빠르게 답을 내리고 싶어하는 심리적 경향을 말합니다. 경험이 쌓일수록 이 욕구가 강해지고, 새로운 정보보다 기존 틀에 맞춰 해석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https://www.apa.org))

    저는 오랫동안 상담을 잘한다는 것이 빠르게 파악하고 정확하게 조언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동료 상담사들과 함께 일하고, 수많은 내담자를 만나면서 배운 가장 큰 교훈은 달랐습니다.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장 흔한 이유는 무지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예전에 이런 문장을 메모에 적어둔 적이 있습니다. "사람을 오해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행동만 보는 것이고, 사람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마음을 묻는 것이다." 지금도 이 문장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진짜 전문가는 가장 빨리 답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 오래 궁금해하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상담도, 관계도, 결국 그 호기심이 살아 있을 때만 진짜로 사람을 만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