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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그 아이를 만났을 때, 저는 잠시 말을 잃었습니다. 엄마 손에 이끌려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온 아이는 긴 소매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한여름이었는데도요. 아이는 눈을 잘 마주치지 않았고, 제가 건네는 말에는 짧게만 답했습니다. '이 아이, 얼마나 오래 혼자였을까.'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학교폭력 피해 학생을 만날 때마다 저는 비슷한 감각을 경험합니다. 아득하고 먹먹한 그 느낌. 폭력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무게감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단어 뒤에 붙어 있는 긴 시간, 혼자 버텨온 날들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트라우마가 남기는 것 — 사건이 끝나도 끝나지 않는 이유
학교폭력 피해 이후 아이들이 겪는 심리적 반응은 단순한 '기분 나쁨'의 수준이 아닙니다. 임상 현장에서는 이를 외상 후 스트레스 반응(PTSR, Post-Traumatic Stress Response)으로 분류합니다. 여기서 PTSR이란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이후 그 기억이 반복적으로 침투하거나, 관련 자극을 회피하거나, 감정이 무뎌지는 등의 반응이 지속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학교폭력 피해 청소년의 경우, 이 반응은 사건이 종결된 이후에도 상당 기간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한 중학생 내담자는 학폭위(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 심의가 끝난 지 수개월이 지난 뒤에도 등교를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반 친구들이 저를 싫어할 것 같아요"라고 했는데, 실제로 그 반 아이들 중 절반은 이미 그 사건을 기억조차 못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뇌는 여전히 위협이 진행 중이라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겁니다. 이것이 트라우마의 핵심적인 특성입니다. 객관적 사실과 무관하게, 신경계가 과거의 위험을 현재의 것으로 처리한다는 점입니다.
특히 유대 욕구(attachment need)가 높은 아이일수록 이 상처의 깊이가 남다릅니다. 여기서 유대 욕구란 타인과 연결되고 싶은 근본적인 심리적 욕구를 의미합니다. 친구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아이가 바로 그 친구로부터 배제당할 때, 그 충격은 단순한 다툼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부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청소년기 또래 관계를 정서 발달의 핵심 축으로 규정하고 있으며(출처: WHO 청소년 건강), 이 축이 흔들릴 때 나타나는 반응이 얼마나 광범위한지를 설명합니다.
피해 아이들이 자해나 자기 비하로 이어지는 경우, 그것은 '나쁜 아이'여서가 아닙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적 고통을 조절하려는 나름의 방식으로 작동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이 행동을 단순히 막으려는 시도보다, 그 이면의 고통을 먼저 이해하는 접근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자존감이 무너진 자리 — 말보다 경험이 먼저입니다
상담을 하다 보면 주변에서 아이에게 가장 많이 건네는 말이 무엇인지 물어보게 됩니다. "괜찮아", "너는 잘못한 게 없어", "넌 충분히 잘하고 있어." 좋은 말들입니다. 그런데 아이는 그 말을 들을수록 오히려 더 공허하다고 합니다. '왜 이 말이 저한테 안 닿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는 아이를 여럿 만났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자존감(self-esteem)은 언어로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성취 경험과 수용 경험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자기 수용(self-acceptance)과 타자 신뢰(trust in others)를 건강한 심리 발달의 두 축으로 봅니다. 여기서 자기 수용이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고, 타자 신뢰란 타인이 나를 받아줄 것이라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학교폭력 피해 아동은 이 두 가지가 동시에 무너진 상태에 놓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결함이 있는 사람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거부한다'는 인식이 반복적으로 강화되기 때문입니다.
검토 결과, 이 두 가지를 회복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구체적인 경험의 축적입니다. 무언가를 스스로 만들어 완성하는 경험, 제가 "됐다"라고 말하지 않아도 아이 스스로 "나 해냈다"라고 느끼는 순간들의 반복이 필요합니다. 한 상담 장면에서, 종이비행기를 함께 만들던 아이가 제 도움 없이 균형을 맞춰 멀리 날리는 데 성공했을 때, 그 아이의 표정이 달라졌습니다. 말 한마디로는 만들 수 없는 표정이었습니다.
부모와 교사가 자주 오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잘하고 있어"라는 말이 오히려 아이의 성취 경험을 대신해버린다는 점입니다. 결과가 아닌 과정을, 평가가 아닌 동행을 선택하는 것이 이 시기 어른의 역할입니다. 한국청소년상담복지개발원에 따르면 자해 경험 청소년의 회복에는 성인과의 지속적이고 신뢰로운 관계 형성이 가장 중요한 보호 요인으로 작용합니다(출처: 한국청소년상담복지개발원).
유대 회복의 첫 걸음 — 관계는 감각으로 배웁니다
피해 학생이 가해자로 몰리는 상황은 생각보다 흔합니다. 실제 사례를 보면, 집단적 따돌림과 언어적 공격을 당한 아이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전화로 폭언을 했고, 그 녹음이 증거로 제출되면서 오히려 가해자로 기록된 경우가 있었습니다. 따돌림의 증거는 없고, 폭언의 증거만 남아 있는 구조. 이 상황에서 아이가 "제가 가해자예요"라고 스스로를 정의 내리는 것은 자기 객관화가 뛰어난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자신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기준을 적용하는 자기 처벌적 귀인(self-punitive attribution) 방식이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귀인이란 어떤 사건의 원인을 자신 혹은 외부에 돌리는 심리적 과정을 의미합니다. 피해 경험이 반복되거나 지지 체계가 약한 아이들은 부정적 사건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 내부 귀인이 고착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패턴이 자존감 저하와 자해 행동으로 이어지는 경로는 임상적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유대 회복은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단 한 명이라도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경험을 '감각으로' 체험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넌 괜찮아"라는 말을 듣는 것과, 누군가와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 웃은 기억이 쌓이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경험입니다. 상담 장면에서 아이와 함께 만들기를 하거나 게임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그냥 '친해지려는 행동'이 아닌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 경험 자체가 '나는 누군가와 연결될 수 있다'는 신경계 수준의 학습입니다.
반대 사례도 흥미롭습니다. 담임교사에게서 "우리 반에 왕따가 있어요"라는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상담실을 찾은 부모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이를 만나 보니, 아이는 태연하게 "저요? 저는 제가 반 전체를 왕따 시키는 중인데요"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따돌림 상황이어도, 아이가 어떤 관계적 토대 위에 서 있느냐에 따라 그 경험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평소에 쌓아온 부모와의 신뢰,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결정적인 완충재가 되는지를 실감한 순간이었습니다.
어른이 해야 할 것 — 공감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입니다
학교폭력 상황에서 어른들이 가장 자주 범하는 실수는 사건의 잘잘못을 먼저 따지는 것입니다. 누가 먼저 잘못했는지, 어느 쪽이 더 피해가 큰지, 학폭위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이 모든 것이 필요한 절차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앞에 반드시 놓여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 이 아이가 어떤 상태인지를 먼저 보는 것입니다.
공감(empathy)은 "그랬구나, 힘들었겠다"는 말 한마디가 아닙니다. 공감이란 상대방의 감정적 현실을 판단 없이 함께 경험하려는 지속적인 태도를 의미합니다. 실제로 상담 현장에서 느끼는 것은, 아이들은 어른이 자신을 '도와주려는지'보다 '이해하려는지'를 먼저 알아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나를 고쳐주려고 하는구나"와 "선생님이 나를 알고 싶어 하는구나"는 아이에게 전혀 다른 신호로 수신됩니다.
치료를 거부하는 아이, 상담을 거부하는 아이를 대할 때 어른들은 종종 당황합니다. 그런데 유심히 보면, 그 아이가 스스로 도움을 찾는 신호를 이미 보내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직접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거나, 스스로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뜻을 내비치는 식으로요. 이 양가감정, 즉 도움받기 싫으면서도 간절히 연결되고 싶은 마음은 그 자체로 회복의 씨앗입니다. 어른이 해야 할 일은 그 씨앗을 억지로 키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랄 수 있는 안전한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아이의 자해 행동, 등교 거부, 치료 거부를 마주하는 부모는 극심한 무력감과 죄책감을 느낍니다. 이 감정 또한 다루어져야 합니다. 아이의 회복은 부모의 심리적 안정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흔들릴수록 아이도 흔들립니다. 아이를 걱정하는 에너지의 일부를 반드시 부모 자신의 돌봄에 쏟아야 합니다. 이것이 아이를 위한 가장 현실적인 선택 중 하나입니다.
- 사건의 잘잘못보다 아이의 현재 감정 상태를 먼저 확인합니다.
- 치료나 상담을 거부하더라도 아이가 보내는 연결 신호를 놓치지 않습니다.
- 부모 또한 전문적인 지지를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의 회복은 부모의 안정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 자해 등 자기 파괴적 행동은 즉각적 제지보다 전문가와의 협력이 우선입니다.
자해나 자기 파괴적 행동을 보이는 청소년이 주변에 있다면, 혼자 감당하려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청소년 정신건강 위기 상담 전화는 보건복지부에서 운영하는 정신건강 위기 상담 전화 1577-0199(24시간)를 통해 전문적인 안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아이가 스스로 연락하기 어려운 상태라면 부모나 교사가 먼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맞습니다.
학교폭력 피해 아이들을 만나면서 저는 한 가지를 거듭 확인합니다. 이 아이들은 약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다는 욕구를 끝까지 잃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증거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욕구를 이용하거나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그 욕구가 안전하게 발화될 수 있는 관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트라우마는 사건으로 생기지만, 회복은 반드시 관계 안에서 일어납니다. 짧은 시간이어도 괜찮습니다. 단 한 번의 진심 어린 동행이, 오래된 상처 위에 새로운 기억을 덮어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