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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오랫동안 이 질문을 가볍게 봤습니다. "아이들이 다 컸는데 이제 편하겠네요"라고 말하는 분들을 보며 당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30년 가까이 상담 현장에서 부부들을 만나다 보니, 현실은 전혀 달랐습니다. 자녀가 독립한 뒤 오히려 더 막막해지는 부부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앞으로 30년을 더 같이 살아야 할 것 같은데요"라는 말이 농담처럼 들렸지만, 그 안에 진짜 무게가 담겨 있었습니다.
빈둥지 증후군, 허전함보다 의미의 상실이 더 컸습니다

제가 상담 현장에서 만난 한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두 분은 아이들이 모두 결혼하고 나서야 처음으로 "우리 이제 뭘 하면 되지?"라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리 나쁜 사이도 아니고, 큰 갈등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어색했습니다. 그 어색함의 정체가 무엇인지 한참 이야기를 나눠야 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 현상을 빈둥지 증후군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빈둥지 증후군이란 자녀가 독립한 뒤 부모가 경험하는 심리적 공허감과 상실감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제가 실제로 겪어보니, 더 정확하게는 "의미의 상실"에 가까웠습니다. 허전한 것이 아니라, 아침에 일어났을 때 해야 할 일이 사라진 느낌입니다.
그동안 부모로 사는 삶은 분명했습니다. 학교 준비물 챙기기, 학원 스케줄 확인, 취업 준비 걱정, 결혼 준비 지원까지. 돌봐야 할 사람이 있었고,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구조가 사라지면서 시간은 오히려 늘어났는데, 그 시간을 채우던 의미가 함께 사라진 것입니다. ([출처: 미국심리학회 APA, Empty Nest Syndrome 개요](https://www.apa.org/topics/parenting/empty-nest))
관계근육이 약해진 부부에게 필요한 것
상담을 하며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사이가 나쁜 건 아닌데 어색해요." 싸우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상태. 제가 보기엔 이것은 관계근육이 약해진 신호입니다.
여기서 관계근육이란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가고 연결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소통 능력과 감정적 친밀감을 말합니다. 근육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쓰지 않으면 굳어집니다. 문제는 많은 부부가 이 사실을 모른 채 수십 년을 살아간다는 점입니다.
부부는 결혼 후 가장 중요한 시간을 부모로 살아갑니다. 아이를 낳고, 학교 보내고, 진학을 걱정하는 과정에서 부부 사이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아이 중심으로 이동합니다. "오늘 학교는 어땠대?", "취업 준비는 어떻게 된대?" 이런 대화들이 부부의 언어를 채웠습니다. 그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부부라는 관계가 뒤로 밀려난 것은 사실입니다. 아이들이 독립하는 순간, 두 사람을 연결해 주던 가장 큰 주제가 사라집니다.
운동을 오래 쉬었다가 다시 시작하면 몸이 뻣뻣한 것처럼, 관계도 처음에는 어색합니다. 그것이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사용하지 않아서 굳은 것입니다.
의미 공유가 없으면 관계는 조용히 멀어집니다
제가 상담 현장에서 느낀 건, 관계를 오래 유지하는 힘은 사랑보다 관심에 가까운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요즘 뭐가 재미있어?", "요즘 무슨 생각 해?", "해보고 싶은 거 있어?" 이런 질문이 사라질 때, 관계도 조금씩 멈추기 시작합니다.
의미 공유란 두 사람이 같은 경험이나 목적을 함께 나누며 관계에 방향성을 부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같은 공간에 살더라도 점점 각자의 세계로 분리됩니다. 졸혼이나 황혼이혼이라는 말이 흔해진 것도 이 흐름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느냐입니다. 어떤 부부는 여행에서 의미를 찾고, 어떤 부부는 봉사활동이나 손주들과의 시간에서 새로운 기쁨을 발견합니다. 제가 만난 부부들 중 관계를 다시 회복한 경우를 보면,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 매일 10분 함께 산책하기
- 아침에 커피 한 잔 같이 마시기
- 같은 드라마를 보고 감상 나누기
- 장을 보러 가면서 이야기 나누기
거창한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작은 일상의 반복이었습니다. ([출처: 한국가족상담협회, 중년기 부부관계 증진 프로그램](https://www.kfca.or.kr))
다시 알아가기로 선택한 부부들이 달랐습니다
30년 가까이 상담을 해오면서 분명하게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좋은 부부는 처음부터 잘 맞는 부부가 아니었습니다. 다름에도 불구하고 계속 만나기를 선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관계는 감정만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관심을 선택하고, 대화를 선택하고, 함께하는 시간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10년 전의 배우자와 지금의 배우자는 다릅니다. 나 역시 달라졌습니다. 그런데도 예전의 모습만 기억한 채 상대를 다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관계는 그 자리에서 멈춥니다. 서로를 궁금해하지 않게 될 때 관계는 어느 날 갑자기가 아니라, 조금씩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상담 마지막에 이 질문을 드리곤 합니다. "오늘 집에 가시면 배우자에게 딱 한 가지만 물어봐 주세요. 요즘 뭐가 제일 즐거우냐고요." 단순한 질문 같지만, 이것이 새로운 30년의 문을 여는 가장 좋은 출발점이었습니다.
앞으로 30년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부담이 아니라 기회입니다. 아이들을 키우느라 잠시 뒤로 미뤄두었던 부부라는 이름을 다시 꺼내볼 시간이 생긴 것입니다. 관계의 방향은 세월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이 정합니다. 오늘 그 선택을 먼저 해보시는 것, 그것으로 충분합니다.